미국 역사 세계 노동절 메이데이 - 헤이마켓
1886년 5월 시카고에서 일어난 헤이마켓 폭동 사건 - 여러 사람을 살해하고 크게 논란이 되고 있는 재판을 거쳐 무죄로 판명된 4명의 남성을 처형 - 했습니다. 미국의 노동운동은 심각한 좌절을 겪게 되었고, 이 혼란스러운 사건은 여러 해 동안 반향을 일으키게 됩니다.
발생 : 1886년 5월 4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노조연맹 | 시카고 경찰 | |
사상자 | 4명 | 7명 |
부상자 | 70명 이상 | 60명 |
연행자 | 100명 이상 |
미국의 노동력 증가
미국 노동자들은 남북전쟁 이후, 조합으로 조직이 되기 시작했고, 1880년대까지 수천명이 조합으로 조직되었습니다. 1886년 봄, 시카고의 맥코믹 하베스팅 머신 컴퍼니에서 노동자들은 사이러스 맥코믹이 만든 유명한 맥코믹 리퍼를 포함한 농기구를 만든 공장에서 파업을 했습니다.
파업 중인 근로자들은 주 60시간 근무제가 보편화된 상황에서 하루 8시간 근무제를 요구했고, 그 회사는 당시 일반적인 관행이었던 노동자들을 가두고 파업을 하지 않는 자들을 고용했습니다.
1886년 5월 1일, 시카고에서는 대규모 메이데이 퍼레이드가 열렸는데, 이틀 후에 매코믹 공장 밖에서 시위가 벌어지게 되고 사람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경찰의 만행에 대한 항의
경찰의 만행에 항의를 하기 위하여 5월 4일에 대규모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회의를 하기 위해 모인 장소는 시카고의 헤이마켓 광장으로, 공공 시장에 사용되는 공개 구역이었습니다.
처음 이 시위는 그 전날 경찰에게 살해 당한 노동자들을 추모하고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파업 참여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는 평화의 행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급진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연사들이 앞에 나아가 약 1,500명의 군중에게 연설했습니다. 이날 회의는 비교적 평화로웠지만 경찰이 등장하여 군중들을 해산시키려 하자 분위기가 점점 대립되기 시작했습니다.
헤이마켓 폭파 사건
경찰이 모임을 해산시키려하자 고조된 분위기에 몸싸움이 일어나게 되고, 어딘가에서 강력한 폭탄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목격한 사람들은 폭탄이 높은 궤도로 군중들 위로 날아오는 것을 묘사했습니다. 폭탄이 떨어져 거대한 폭발을 하면서 파편이 터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경찰들은 무기를 꺼내어 패닉에 빠진 군중을 향해 발포했습니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경찰관들은 2분 가량 쉬지않고 권총을 발사했다고 합니다.
이 폭동에서 경찰 7명이 사망했는데, 사망원인은 혼란 속에서 경찰들이 쏜 총탄에 맞아 숨진 것으로 보입니다. 민간인 4명도 이 사건에서 목숨을 잃었고,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노동조합원들과 아나키스트 비난
이에 대중의 항의는 엄청났습니다. 언론에서도 끊임없이 보도를 하면서 사건에 기름을 부어댔습니다. 2주 후,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출판물 중 하나였던 프랭크 레슬리의 일러스트레이티드 매거진의 표지에는 '무정부주의자들이 던진 폭탄'의 삽화와 근처 경찰서에서 부상당한 경찰관에게 마지막 의식을 치르는 한 신부의 그림이 실리기도 했습니다.
폭동의 원인을 노동운동을 했던, 특히 당시 미국 최대 노조였던 노동기사단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공정하든 아니든 널리 신빙성을 잃은 노동 기사단은 회복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미국 전역에 퍼진 신문사들은 "아나키스트들"을 비난하고, 헤이마켓 폭동의 책임자들을 교수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스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8명의 남성들에 대한 고발이 제기되었습니다.
아나키스트의 재판과 처형
시카고의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재판은 1886년 6월 말에서 8월 말까지, 여름의 대부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재판의 공정성과 증거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이 계속 제기돼 왔습니다. 제시된 증거들 중에서 일부는 폭탄 제조에 대한 초기 법의학적 연구로 구성되었는데, 누가 폭탄을 만들었는지 재판중에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8명의 피고 모두 폭동을 선동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게 됩니다. 8명 중 7명은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887년 11월 11일 사형수 중 한 명이 감옥에서 결국 자살을 했고, 다른 네 명은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들 중 두 명은 일리노이 주지사에 의하여 종신형을 선고 받게 됩니다.
Haymarket 사례 검토
1892년 일리노이 주지사는 개혁입찰로 출마한 존 피터 알트겔드에 의해 당선되었습니다. 새 주지사는 노동 지도자들과 변호사 클라렌스 다로우로부터 헤이마켓 사건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수감자 3명에게 관용을 베풀어달라는 탄원서를 받았습니다. 유죄판결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헤이마켓 폭동 이후 판사와 배심원의 편향과 대중의 히스테리를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주지사 알텔드는 이루어진 재판이 불공정했고, 사법의 유산이었다고 말하며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앨트겔드의 논리는 타당했지만, 보수적 목소리가 그를 "무정부주의자들의 친구"로 낙인찍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의 정치 경력을 손상시키는 사건이 되기도 했습니다.
미국 노동력을 위한 헤이마켓 폭동
도대체 누가 헤이마켓 광장에 폭탄을 던져서 사건을 크게 만들었는지는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미국 노동운동을 비판하는 자들은 그저 이 사건을 과격파와 폭력 무정부주의자들을 연결시켜 노조의 신용을 떨어뜨리는 데 이용하기에 급급했습니다.
헤이마켓 폭동은 수년 동안 미국인들의 삶에 반향을 일으켰고, 이 사건이 노동운동을 후퇴시켰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노동 기사단의 힘은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회원 수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세계 노동절 메이데이
이후에 제2인터네셔널에서는 이날의 투쟁과 그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5/1 을 세계 노동절로 정하게 됩니다. 2004년에는 헤이마켓 순교자 기념물을 세웠고, 1997년에는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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